1. 딱 5년 전이다. 그때 영국에 살고 있었는데 거의 매일 BBC 뉴스 첫머리를 우크라이나 사태가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문제로 촉발된 소요가 EU와 나토 가입을 두고 우크라이나 동부(친 러시아)와 서부(친 서방) 간의 유혈 충돌로 확산하고 있었고, 결국 2014년 3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는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사실상 자국의 영토로 흡수한 것.


2. 당시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게 바로 '부다페스트 합의'였다. 부다페스트 합의는 소련 해체 후 얼떨결에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 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를 위해 우크라이나 안보를 보장하고 핵폐기 비용과 기술, 그리고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는 주요 4개국 간의 합의다. 우크라이나, 영국, 미국,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이 합의의 주요 내용은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과 국경선을 존중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적 통합과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무력 사용 및 사용 위협을 자제한다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합의에 따라 자국의 비핵화를 실행했다.


3. 부다페스트 합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이뤄지는 동안 미국, 영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일련의 러시아 행동에 무력하기만 했다. 경제 제재 외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부다페스트 합의라는 건 휴지조각에 불과했고, 국제사회에서는 약속이나 법이 아니라 군사력이 주권을 지탱함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에 다름아니었다. 우크라이나 한 정치인은 만약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계속 갖고 있었다면 러시아가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4.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보수 논객 조갑제 씨도 우리나라를 걱정했다. 북한의 남한 핵공격에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따져 묻기도 했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452&C_CC=AZ 참조


5. 사실 조갑제 씨와 같은 논리가 지금 북한의 입장으로 보인다. 리비아나 우크라이나처럼 협정을 통해 비핵화한 뒤 만약 사태가 급변해 미국이나 타국의 공격을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주권과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가 핵심 의문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 상태 북미 간 신뢰도(current level of confidence)를 반영한 제안을 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단계적 접근을 선호하는 이유다.


6. 트럼프가 영변 핵시설 외에 다른 핵시설을 언급함으로써 북한을 놀라게 했다는 건 아마도 거래대상으로 논의되지 않았던 시설을 트럼프가 언급해 북한이 황당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터넷에도 이미 지도화되어 공개되어 있는 북한의 여러 핵시설에 대해 트럼프가 언급했다고 김정은이 트럼프가 이 정보를 어떻게 알았나 놀랐을 것 같지도 않다. 이번 정상회담 의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니 놀란듯한 느낌이다.


7. MBA 과정 때 협상학을 가르치셨던 교수님이 '근원적 해결'을 주장하지만 않으면 사태해결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고 하셨다. 더불어 '있는 그대로 상황관리'를 할 수 있어야 조금씩 상호신뢰를 확보하고 작은 합의점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셨다. 미국이나 북한이나 결이 다르지만 판을 깨는 언급은 삼가는 것으로 보아 해결의 실마리는 여전히 있어 보인다.


8. 요 며칠 간 기대가 높아져서 북미 회담 실패에 대해 실망이 많지만, 돌아보면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1년 새에 벌써 두 번이나 만났다. 이런 만남이 조금씩 쌓이면 그 과정이 곧 평화가 될 것이다. 평화란 결과가 아니라 결국 과정이다.


2019년 3월 2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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