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변에 꼭 권하고 싶은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한 책이다. 다음 사례에서 공통점을 찾아보자.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의 발포 명령서를 찾지 못했으므로 전두환에게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위안부' 강제동원에 관한 일본 정부나 군대의 공식 문서가 없으므로 '위안부'란 날조된 역사에 불과하다. 홀로코스트를 명령한 히틀러의 공식 문서를 찾지 못하는 한 히틀러에게 홀로코스트 개입을 따져 물을 수 없다. 이 사례들은 문헌과 기록에 기반한 실증의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다. 이런 시도는 홀로코스트, '위안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부정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널리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2. 서강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는 그의 책 [기억 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에서 근현대사를 인식하는 역사학의 지평을 문헌, 기록에서 피해자의 증언, 기억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역사 인식론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정한 역사 사건에 관한 공식 문서 기록과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의 목소리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역사적 신빙성을 갖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임지현 교수는 피해자의 증언과 기억이 살아 있는 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인다. 그 기억이 과장되고 부정확하고 때로는 왜곡되었더라도 말이다. 그에 따르면 실증주의는 이데올로기이자 폭력이다. 가해자들이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기록이란 힘 있는 가해자들의 선택과 배제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풀뿌리 기억을 부정하고 마치 범인을 취조하듯 그 기억의 모순을 끄집어내려는 시도가 잦기 때문이다.

 

3. 홀로코스트 사례처럼 이제 피해자가 역사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지만 얽히고설킨 역사 속의 존재란 회색지대의 실존인 경우가 많다. 어떤 희생자는 암묵적, 적극적 가해 공범이기도 했으며 어떤 가해자는 이제 희생자로 자신을 탈바꿈하기도 한다. 나치의 최대 피해자라 자부하는 폴란드인들의 유대인 학살 사건이나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했으면서도 나치 독일의 첫 번째이자 최대 피해자라고 코스프레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이런 사례로 언급된다.

 

4. 저자는 희생자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성찰 없는 '세습적 희생자주의'를 경계한다. 폴란드나 한국,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후 세대는 참으로 떳떳하다. 단지 희생자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일, 일본의 전후세대에게 '집합적으로 유죄'를 묻지만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을 당하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했던 경우와 논리적으로 하나도 다를 바 없게 된다.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2차 세계대전의 학살과 만행의 책임을 전후 세대에게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에 따르면, 그 역사의 연루된 주체로서 전후세대는 '역사를 기억할 책임'은 최소한 져야 한다.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 베트남이 한국민의 책임을 물을 때 당신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5. 책을 보면 홀로코스트가 결국 서국 제국주의의 선주민에 대한 폭력적 정책과 학살에 그 뿌리를 대고 있음이 드러난다. 저자는 그 바탕에서 세계사적 각종 희생들이 국경과 영토를 넘어 전 지구적 '기억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역사 속의 사례와 사실, 그리조 저자의 주장이 촘촘하고 탄탄하게 펼쳐지면서도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게 잘 구성되어 있다. 기대와 달리 당신이 원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지 않고 오히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도 되겠지만 당신의 역사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이 책이 올 1월 말에 나왔으니 이영훈류의 책을 예비한 걸까 싶기도 했다.

 

2019년 9월 19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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