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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2년 전 소위 황우석사태 때 꽤나 황우석교수를 지지하는 쪽에 있었다. 이런 나의 입장은 내 글 "피디수첩과 황우석사태를 바라보며", "과학은 그냥 사이언스에 맡겨라..", "나름대로 정리해 본 황우석 우화", "네티즌을 파시스트라고 규정하는 시각에 대한 짧은 생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이곳저곳의 게시판에서 많은 사람들과 논쟁하며 황우석교수를 변호하고 옹호하고 그랬지만, 결국 사건의 진실은 밝혀졌고 내게 남은 것은 어떤 정신적 트라우마 밖에 없는 듯 하다.


2. 이제 황우석사태는 2년이 지났고, 내 개인적으로는 뭔가를 한 번 쯤은 짚고 정리해볼 시점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나는 전향자이고, 그런 전향자는 항상 자신이 지지했었던 그룹에 대해 가장 가혹하게 행동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내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치료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의 책 한 권을 선정한 후 이 책의 논리에 대비해 이러한 유전자 치료의 문제점을 집중 부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전자치료 혹은 줄기세포 관련 책 중에서 저자가 주로 의사이거나 생물학자인 책을 우선 몇 권 찾아봤고, 그 중에서 제목이 가장 선정적인 듯한 책 한 권을 선택했으니 그 책이 바로 오늘 이곳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9년 후, 줄기세포치료”라는 책이다.


3. 사실 인터넷 쇼핑이란 마술은 멀리 광화문까지 책을 사러가야 하는 수고를 없애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 주지만, 때론 책 제목을 통해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의 책을 구매하게 만드는 또 다른 마술을 보여 주기도 한다. 내가 바로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어 버리고 말았다. 유전자 치료 혹은 줄기세포치료의 장밋빛 미래를 보여 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이 책 “9년 후, 줄기세포치료”는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라는 기술에 대해 꽤나 조심스럽거나 혹은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각종 미디어를 달궜던 다른 과학자들과는 달리 유전자 치료와 관련한 윤리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었다. 저자가 미국과 한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전자 치료 연구를 수행하였다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상당히 의외의 내용이었던 게 사실이었다.


4. 나는 마치 전장의 흐름을 잘못 읽은 장수처럼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어찌하겠는가? 속된 표현으로 나는 이미 낚이었고, 이제 새로운 상황에서 이에 맞는 전선을 재형성할 수 밖에.. 결국 이 글은 황우석사태에 대한 내 개인적 정리가 아닌 그저 이 책 "9년 후, 줄기세포치료"에 대한 서평이 되겠다.(다시 말해 여러분도 내게 낚인 것이다.)


5. 내가 보기에 저자의 유전자 치료와 관련된 윤리관의 핵심은 이미 ‘1장 읽기전에’에서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근거중심의학’이다.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이란 환자를 치료하는 데 가장 근거가 확실한 연구 결과를 이용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류이다. 즉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임상 증거 및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거중심의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신뢰성 높은 연구논문이다.(p20)"

"의학자들은 근거중심의학의 기본이 되는 우수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우수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본인의 명예를 높이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계획단계부터 철저히 준비되어야 하고(전향적 연구), 연구 대상이 편향되어서도 안 되며(무작위), 결과를 미리 예측하지 않고 비교하여야 한다(이중맹점). 말이 쉽지 이러한 원칙을 지쳐 연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끈기를 요하는 일이며, 연구자의 양심과 상당액수의 연구비를 필요로 한다.(pp22-23)"


6. 이러한 내용의 ‘근거중심의학’의 철학은 이 책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저자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는 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술이나, 그것들이 임상적으로 안전하고 적용가능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는 충분한 검토를 거쳐 승인되고 통제되어야 하며, 그 내용이 과장되거나 헛되게 포장되어 대중에게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에 대한 연구를 옹호하는 한편 이러한 연구가 잘 통제되어 실행된다면 결국 인류의 건강과 복지에 기여할 것이라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저자가 인용한 싸이언스의 사설과 그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의학이 서서히 발전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항암 치료가 그랬고, 장기 이식 또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발전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희생을 치루고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낙관론보다는 진중하게 연구에 정진함으로써 대중의 확신과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유전자 치료가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동안 발생한 문제점들에 속속들이 알려야 할 것이다. (pp114-115 싸이언스 사설 인용 부분)"

둘째,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식물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인간의 복지를 위해 희생이 가능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나타난다. 저자의 글을 인용해 보자.

“만일 유전자변형에 따른 문제가 발생한다면 동ㆍ식물의 경우는 생명을 담보로 관리가 가능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섣부른 조작으로 유전자 변형 인간이 생산될 경우 수백만 년 보존되어온 인류 특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파장에 대해서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7. 자, 이제 앞서 임의적으로 구분한 두 가지의 관점에 대해 나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일개 네티즌이 권위있는 의대 교수의 입장을 살펴보기란 사실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훈련이 바로 작은 시냇물을 장강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우선,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 연구 옹호에 대해 살펴보자.


8. 사실 나는 이제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의 그 가능성이나 효용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는 그 특성상 결국 환원론적(reductionism) 입장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환원론적 입장이 사회문제나 환경문제에서 적절한 답을 줬다고 내 스스로 이제는 판단내리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어떤 특정한 문제가 가장 작은 요소 하나만을 조작함으로써, 혹은 분석함으로써 해결된 적이 있었던가? 이건 인류 이후 하나의 이상이었지만, 다른 말로는 수천년 간에 걸친 사기극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9. 이제 나는 물리적인 현상이 됐든, 사회적인 현상이 됐든 혹은 생물학적인 현상이 됐든 그 원인은 단 하나가 아니라 주된 한 요소와 부수적인 여러 요소의 네트워크에 의해 발현된다고 믿게 되었다. 물론 최근 2년간 읽었던 네트워크관련 이론서들인 '스몰월드'니 '링크'와 같은 책의 영향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안다. 이게 또 다른 반편향일 수 있음을..


10. 내 학부와 대학원 시절 전공의 특성상 생태학(ecology)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이를 적용하곤 했다. 생태학에서는 생태계를 서로 연결된 그물망 즉, 네트워크로 보는데, 이러한 네트워크 효과의 단적인 예로 평가받는 게 바로 1991 년 미국 애리조나주에 완공한 바이오스피어II이다. 지구의 자연을 바이오스피어I 로 하여 이의 완벽한 축소를 통해 생태적 과정과 각종 과학적 현상들을 관찰하고 증명하기 위해 애리조나 사막에 완전히 폐쇄된 유리구 형태로 설립된 바이오스피어II 는 오래지 않아 산소결핍과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라는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토양 미생물에 의한 산소소비와 이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이 그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러한 토양 미생물만을 제거하거나 조작함으로써 해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결국은 모든 문제가 다른 요소(대기, 수목, 수분, 온도 등등)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그 모든 관계를 이해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고 결론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바이오스피어II는 결국 실패한 프로젝트로 남게 되었으나, 이러한 네트워크 효과 혹은 과학이 얼마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느 분야인지를 알게 해 준 교훈 또한 남기게 되었다.


11. 사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거의 모든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치료 또한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으며,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정된 경우에도 그 효과가 기존의 약물 치료와 별차이가 없음을 저자 또한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 저자 또한 이러한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가 병의 기작과 타 세포, 장기, 유전자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의학자로서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 연구를 정교한 통제 속에서 수행할 것을 주장하지만, 어찌보면 이것 또한 ‘근거중심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증명되지 않은 혹은 가능성이 희박한 연구를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과 자원을 투자하자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보인다. 제한된 자금과 인력과 자원이 적절한 곳에 투자되지 못하는 것 또한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12. 차라리 유전자치료와 줄기세포 치료에 투자되는 그 엄청난 돈과 인력을 공공 의료 확충과 각종 사회 질병 예방에 투자한다면 오히려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해본다. 이런 투자가 오히려 사회적 안전망 즉, 네트워크를 더 튼실하게 만드는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13. 다음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대부분의 생물 관련 연구, 아니 대부분의 인간의 행태가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일 수 밖에 없는 듯하다. 따라서 대부분 우리는 인간중심주의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요사이 조류 독감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데, 2003년에 조류 독감이 처음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양계장의 닭을 살처분(요사이에야 이 용어를 사용한다.)할 때의 용어는 바로 폐기였다. 즉, 양계장의 닭이란 결국 살아 움직이나 생명이 없는 또 하나의 공산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닭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14. 많은 사람들이 최근 환경문제나 생명체 복제 혹은 유전공학 문제들을 대할 때 최후의 보루선으로 인간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질 좋고 맛 좋은 고기나 우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황소나 젖소를 복제하는 것은 조금 꺼림직해도 그럭저럭 허락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감히 존엄성있는 인간을 복제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류의 그런 보루선말이다. 실제 클로네이드사가 첫 번째 인간복제 아기를 출산했다고 주장했을 때의 각 미디어의 칼럼을 보면 대부분의 논조가 그러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그러한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쉽게 무시하고 있는 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가 언제든 백인중심주의 혹은 더 나아가 앵글로색슨족(WASP) 중심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5. 실례로 북유럽에서 환경기업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다국적 석유회사인 쉘(Shell)같은 경우 나이지리아에서는 제2의 군사정부로 기능하며, 석유굴취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을 향해 군사적 행동도 주저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쉘에게 원주민이란 인간이 아닐 것이며, 애써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는 북유럽 시민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자연이 파괴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나 인간의 삶과 복지를 위해서라면 결국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인데, 이 때의 인간이란 우리일 수도 있으며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16. 결국 저자가 주장한 인간의 존엄성도 어떤 인간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도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치료가 완성된다 하더라도 결국 빈부의 경제적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의 윤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생명중심의 생명윤리로 갈 때만이 진정한 윤리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즉, 수운 최제우가 이야기했듯이, “내가 한울님이요, 네가 한울님이니, 너와 내가 다 같은 한울님이라.”는 한울사상과 같이 결국 자연도 내 몸이요, 내 몸도 자연임을 깨달을 때만이 진정한 윤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17. 나름대로 글을 써 보지만 결국 세상에 쉬운 문제는 없다는 게 결론이 아닐까 싶다. 내 가족 중에 유전적 질환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때도 나는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진짜 한가한 사람이라고 욕하지 않을까? 2년 전 황우석교수 사태 때 생명윤리관련 학회에서 황우석교수를 비판했을 때 해당 학회에 대해 황우석교수 후원회 홈페이지에 쓰여 있던 글이 문득 떠오른다. “너도 한 번 반신불수로 평생 살아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18. 이 글이 결국 서평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내게 있어서황우석사태는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다. 간디의 말을 빌어, "진실로 가는 길은 없다, 진실이 길이다."로 말이다.

2008년 1월 17일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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