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결혼하면서 제 처가 가지고 다니던 TV를 그냥 버렸습니다. 별로 보지도 않는 바보상자한테 한 달에 2,000원씩인가 꼬박꼬박 수신료 낸다고. 근데 버리는데도 돈이 꽤 들더군요. 쩝.. 여하간.. 그동안은 별 불편함없이 잘 살아왔는데 월드컵이 되니 참 고통스럽더군요.


어제 외근을 나갔다고 집으로 일찍 돌아와서는 어디서 경기를 볼까 짱구를 열라 돌리다가 이상법에게 전화를 했었죠. 씨방새가 핸드폰 꺼놨더군요. 순간적으로 이 자식 광화문 나갔구나하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맥주집에를 가서 맥주나 마시며 볼까 하다가 서울대 문화관에서도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법대 박사과정에 다니는 친구를 꼬드겨서 문화관에서 봤답니다.


7시에 학교 도착해서 친구랑 같이 잔디밭에서 김밥 까먹고, 학교를 거닐면서 페미니즘, 종교, 환경문제, 한국 교수사회의 이중성, 일상적 파시즘, 정치적 진보성과 일상생활의 보수성 등 뭐 이런 잡다한 이야기를 좀 하다가 전망 좋은 자리나 잡아 놓자고 7시 반에 들어 갔답니다. 웬걸.. 자리 하나도 없더군요. 어떻게 알았는지 관악구의 아줌마와 어린이 청소년들은 다 서울대로 온 것 같았습니다. 다들 빨간색 티셔츠입고.. 난리도 아니더군요. 결국 겨우 2층 제일 뒤에 놓은 임시의자에 앉게 되었답니다. 문화관 입구에서는 서울대 학생처가 야광 응원도구도 나눠주더군요. 쩝.. 학생처 대단합니다. 총학생회장은 제적시키면서 학생처하고는 별 상관없는 일에는 돈까지 쓰며 응원도구 나눠주고..


여하간 문화관 분위기 정말 장난 아니었습니다. 선수 얼굴만 나오면 소리를 질러대는데 다들 미친게 아닌가 싶더군요. 특히 히딩크 감독 얼굴 나오니까 거의 자지러지더군요. 그 유명한 대~한민국 응원도 계속 해대고.. 저는 솔직히 그 분위게 몸을 못맡기겠더라구요. 그냥 배외자처럼 제일 뒤에서 구경하며 친구랑 페미니즘에 대해서나 조금 더 이야기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영화관처럼 등이 꺼지면서 정말 분위기가 무르 익더군요. 어둠 속에 빛나는 야광 막대기들 하며, 외쳐대는 응원구호들하며..


처음에 안정환이 페널티킥을 하는데 꼭 실축할 것 같더라구요. 근데 정말 실축하더군요. 그러다가 곧 비에리가 득점을 하고.. 순간 조용해졌다가.. 다시 열심히들 응원하구요.. 근데 다들 오늘 한국 선수들의 몸이 무거워보인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지난 경기처럼 빠른 몸놀림이나 깨끗한 패스가 나오지가 않더군요. 이탈리아가 역시 포루투칼보다는 한 수 위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더군요. 순간적으로 압박하다가도 다시 수비 쪽으로 내려가고 하면서 말이죠. 쩝.. 전반의 무기력한 모습을 하며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간간히 잡히는 히딩크의 모습에서도 긴장된 모습이 보이구요. 후반이 시작되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를 차례로 넣는 것을 보면서 쉽지 않은 경기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승부스를 던지는구나하는.. 솔직히 후반 40분이 지나면서는 패배에 대한 마음을 준비하가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가 기도를 했답니다. 그것도 두 손 모아지고 말이죠. 한울님(요즘 동학에 관심이 많으니...), 부처니, 예수님, 알라신 여하간 여러 신령님 이렇게 사람들이 원하는데 한 번 이기게 해 주소 하고 말이죠. 참..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그때는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니 설기현이 바로 골을 넣어주더군요. 그때 정말 다른 분들도 그랬겠지만 문화관 난리 났습니다. 다들 가지고 있던 야광 응원봉 집어 던지고 아무나 붙잡고 껴안고 하이파이브하고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뭐 다들 일어서서 봤습니다. 계속 응원하고 소리지르고 탄식하고..그러다가 안정환의 골이 들어갔습니다. 이영표가 센터링하는 순간 필이 팍 꽂히더군요. 들어갈 것 같다. 순간 들어가고.. 저는 옆에 있던 국민학생 하나 안고서 복도 한참 돌아다니고.. 벽두드리고.. 와, 정말 그 순간 눈물이 다 나더군요. 정말 그 순간의 기쁨이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더군요.. 크..


거의 대부분 걸어서 녹두거리로 왔는대요.. 녹두거리는 정말 광란 그 자체더군요. 버스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 흔드는 놈, 지나가는 차 두들기며 대~한민국 외치는 놈, 물 퍼와서 그냥 사람들 위에 뿌리는 놈.. 경찰이 나와서 통제를 하는데, 경찰이 부는 호르라기도 삐삐 삐 삐삐 이렇게 불더군요. 웃겨서 말이죠. 그러면서 학생들 조금만 들어가라고 하고.. 뭐 단속하겠다고 하던 것 하나도 단속안하더군요. 그냥 안전만 신경쓰는 눈치였습니다. 누군지 슈퍼가서 바카스 사다가 경찰에 나눠주고..  다들 하나된 모습이었죠. 거의 한 시간 정도 교통이 거의 마비되다 싶이 했었죠.


저는 그 후에 해인이랑 미국에서 잠시 들어와 있는 진희, 상법이 (이 놈은 여자친구 집에 가서 축구를 봤다고 하더군요.), 종현이, 경락이, 치영이랑 녹두호프가서 또 한 3시 넘어까지 술 퍼마셨습니다.


아, 정말 감격적인 밤이었습니다. 내 친구는 페미니즘 그룹 모임이 있다고 갔는데, 그 페미니즘 그룹 모임에서 월드컵을 통해 확산되는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많이 경계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냥 4년에 한 번 아니 우리 평생에 한 번 정도인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놀자고 그랬답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2002년 6월 19일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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