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봄 생각

남해읍 독립서점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주인 내외랑 이야기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서점인데 커피와 차를 판다. 커피를 시켰더니 원두를 직접 갈아 커피 맛에 따라 물 온도를 맞추고 필터에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르완다산, 에콰도르산, 베트남산 등 다양한 원두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찐 밤, 맑은 물, 그리고 커피가 나무 쟁반에 받쳐져 함께 나온다. 모두 손으로 하다 보니 한참 걸린다. 그래도 불평하는 손님 하나 없다. 어떻게 커피를 내리고 쟁반을 준비하는지 모두 보이는지라 그저 그 정성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소프트웨어업계에 종사하며 속도, 효율, 자동화, 기계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오랜만에 전혀 다른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 커피를 기다리며 한나 아렌트의 책을 샀더니 주인이 커피를 준비하며 그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양심사를 추적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지만, 사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평범한 한 명의 공무원'이 아니라 그전부터 자발적인 파시스타였다고. 커피를 시키고 그 커피를 손으로 내리는 책방 주인과 한나 아렌트와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에서 남해로 귀촌해 살고 있는 이 부부의 얼굴은 평화롭고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강남 아파트와 스타벅스가 없어도 삶은 어쩌면 그 자체로 행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천 다솔사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다. 이 사리탑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 탓에 여러 사람들이 찾는다. 연화수에 손을 세 번 씻어 몸과 마음을 정화한 뒤 사리탑을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며 소원을 빌라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 따라 손을 씻고 사리탑전에 올라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며 소원을 빌었다.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회사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딸 공부 잘하게 해 주십시오" 같은 뻔하디뻔한 소원을 빌다 내려왔다. 사리탑전에서 돌아 내려오는데 다른 안내판이 보인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항상 감사하라." 글귀가 죽비처럼 내려친다.

2025년 3월 9일
신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