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5년 12월 8일 오후 5시 인천공항.


우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여행사 사장의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겁게 느껴진다. 대한항공 인터넷 홈페이지와 인천공항의 운항정보판에는 이날 오후 6시 40분 필리핀 세부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정상적으로 출발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여행사 사장이 조금 지친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항공사의 파업은 여행사에게는 언제나 보상받지 못하는 추가적인 비용과 활동을 요구하니까...


우리에게 다가온 여행사 사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 세부행 대한항공이 최종적으로 취소되었습니다."


출발 1시간 40분을 남겨놓고 대한항공은 최종적으로 세부행 여객기를 취소시킨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직원들 사이 여기저기서 육두문자들이 터져 나온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아, 씨벌. 왜 하필 오늘이여?"

"뭔 놈의 파업은 파업이야, 아 진짜!"


그럴만도 하지. 이게 어떤 여행이던가? 1년간의 기다림과 1개월 이상의 준비와 고객의 양해가 있었던 여행이 아니던가? 


'오늘 일진 정말 더럽군.'


내 머리 속으로 오늘 하루의 지독했던 교통체증의 기억이 밀려 들어온다. 아침 11시 발표를 위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발했음에도 30분이나 늦어버렸던 기억하며, 회사로 돌아오며 겪었던 정말 상상불능의 그 교통체증말이다.


'아, 오늘은 정말 교통이 나를 미치게 하는구나.' 속으로 이렇게 욕지거리를 해대면서도 나는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과 이제 뭔가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닐 구멍은 언제나 있지 않았던가?



2.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만큼이나 우리 회사 직원들의 마음도 심난함을 그들의 담배 피는 표정에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여행사 사장이 오늘 세부로 출발하는 필리핀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좌석을 알아 봤지만 13명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유좌석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여행사 사장은 자신이 큰 죄라도 지은 듯 미안해 하며, 국내콘도를 예약해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국내 콘도라.. 가서 스키를 타며 워크샵을 진행해야 하는 것인가?'


폐속 깊이 담배를 들이키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이건 대안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다.'


'사장이 결정하면 직원은 따른다'는 불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회사가 아니던가? 나는 래종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여행사 사장에게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저희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해외에서 워크샵을 할 겁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1주일 후라도 출발을 하겠습니다. 관련 상품을 즉각 알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단호한 결단에 직원들의 흔들리는 눈빛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감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가는거다. 언제나 역사는 고난의 행군이 아니던가?'


여행사 사장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12월 9일 아침에 출발하는 홍콩 여행상품이 있다며 이 상품이 어떻겠냐고 문의를 한다. 하지만 그 상품을 선택할 수 없음은 너무나 명확했다. 어떤 여직원은 해변가에서 입을 6만7천원짜리 비치용 수영복을 준비해 오지 않았던가? 모두 가방 속에 수영복과 여름옷만을 준비해 온 상황에서 홍콩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여행사 사장은 다시 이곳저곳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더니 12월 9일 저녁에 출발하는 3박4일의 필리핀 수빅 여행상품을 제안했다.


'수빅? 예전에 미해군 기지가 있었고, 필리핀의 반미 운동에 따라 미군기지가 철수한 곳?'


사실 수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한국에서 출발하는 여행상품이 있을 정도라면 아마 동남아의 다른 곳과 비슷할 것이라는 판단은 섰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비행편이었다. 다시 또 대한항공이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한 직원이 흥분한 어투로 바로 말문을 열었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이 아니어야 합니다." 


직원들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필리핀의 세부 퍼시픽 항공입니다."


'세부 퍼시픽 항공? 그런 항공사도 있었나?'


처음듣는 항공사 이름에 나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찬밥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 이제 우리의 새로운 목적지와 일정은 결정이 났다. 남은 문제들만 해결하면 된다.



3. 가장 큰 문제는 12월 12일에 대전 ETRI에 가서 용역완료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실 출발때까지도 아직 용역은 완료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래서 한 팀장은 세부에서 일을 해서 마치겠다고 노트북까지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3박 4일 일정으로 수빅을 가면 우리는 월요일 밤늦게서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사실 일반적인 용역이라면 그냥 하루 늦게 용역완료를 하고서 하루치의 지체상금을 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 용역은 12월 12일까지 용역완료를 하지 못할 경우 계약 자체가 취소된다는 계약특수조건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나라도 일찍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지며 다시 또 한 개피의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가 오늘 회사에서 날을 새서 일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납품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금요일이라는 하루가 여유롭게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로 돌아간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이미 가족과 고객들에게 출국인사를 마치고 거창하게 떠나온 상태가 아닌가?


인천공항 도착층에서는 많은 공항버스가 도착하고 또 출발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공항버스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의 눈은 순간적으로 빛났다. '을왕리해수욕장'이라는 표지판을 단 공항버스가 지나가고 있음을 순작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을왕리해수욕장에서 1박을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세부에서 하기로 한 회사 연말 결산 워크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미 세부로 떠난 몸이니 모두 휴대폰은 꺼 주십시오."


그리고서 나는 ETRI 사업 담당 팀장에게 워크샵 후 내일 납품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을왕리의 호텔에서 마쳐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의 지혜와 용기와 결단이 갖은 고난을 극복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4. 을왕리해수욕장의 풍경은 여느 겨울해수욕장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횟집의 뻔떡거리는 붉은 간판만이 그곳이 바닷가임을 알려줄 뿐 어둠 속에 깊이 잠긴 바다를 보기는 어려웠다.


공항에서 가져온 을왕리해수욕장 근처 호텔 리플렛을 보며 을왕호텔에 전화를 했다. 평일이기에 당연하게도 방은 있었고, 다만 모텔에 비해 방당 2만원 정도가 더 비쌌다.


'우리는 지금 세부에 왔다. 따라서 우리는 모텔이 아닌 호텔에서 자야 한다.'


이런 마음을 먹으며 호텔측과 자세한 협의를 하자, 같이 따라온 여행사 사장이 내게 휴대폰을 넘겨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는 즉시 호텔측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서는 여러 이야기를 한참을 나누더니,


"방당 5만원에, 즉 여행사가격으로 협상을 마쳤습니다. 편히 이곳에서 쉬시면 되겠습니다. 내일 공항으로의 셔틀버스 서비스도 호텔 측에서 제공할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


호텔은 아담하면서도 정갈했다.



5. 그리고 을왕리 해수욕장 한 횟집에서 회랑 소주 열라 먹었다. 그 다음에 호텔에서 회사 워크샵을 하며 또 술 엄청 먹었다. ETRI 담당 팀장은 그 다음날 새벽 8시까지 작업을 해서 그 결과물을 내게 줬고, 나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아침 9시에 회사로 돌아가 납품물을 만들어 대전 ETRI에 가서 납품을 했다. 그리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니 저녁 8시 30분이었다. 직원들은 하루 종일 을왕리 해수욕장과 인천공항 신도시에서 놀았단다. 그리고 밤 11시 40분 비행기로 수빅갔다.


6. 우리가 간 수빅은 관광특구이자 경제특구인 곳이었다. 미해군기지를 개조해 만든 특구 이름이 SBMA였다. SBMA에서 이틀밤을 잤다. 호핑투어도 하고, 낚시도 하고, 스노클링도 하고 제트스키도 타고 밤마다 술도 먹고 그랬다.


7. 필리핀 3일째날 배를 타고 작은 섬인 Grande Resort 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는 그러니까 리조트다. 창문을 열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그런 리조트다. 거기서도 스노클링하고 밤낚시하고 술 열라 먹고 그랬다. 그리고 배타고 다시 SBMA로 돌아온 뒤 SBMA 옆에 있는 도시에 가서 시장도 구경하고 학생들 퍼레이드도 구경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와서 인천으로 돌아왔다.


8. 출발할 때 필리핀 온도가 32도인가 그랬는데, 12월 12일 저녁에 인천에 오니 영하 10도인가 그랬다. 그러니까 하루에 40도 정도의 온도차를 경험했다. 한국에 오니 존나 추웠다. 차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참 좋았다. 얼굴이 너무 많이 타서 살갗이 벗겨지고 있다. 당분간 피부관리에 들어가야겠다.


9. 결론적으로 수빅은 해양스포츠를 즐기며 휴양하는 곳이다. 뭔가 화끈한 것 바라면 거기 가지 말아야 한다. 거의 모든 일정은 수빅공항 반경 3km 이내의 관광 특구에서 이뤄진다. 물도 맑고 따뜻하지만 베트남 하롱베이나 몽골의 흡스굴에 비하면 그 감흥이 떨어진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냥 Grande Resort에서 아무 생각없이 놀기에는 괜찮다.


10. 원래 3박 5일이었던 일정이 대한항공의 파업으로 직원들에게는 결국 4박 5일의 일정이 되었다. 같이 근 5일간을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서로가 매우 친해졌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내년에는 직원들 꼬드겨서 몽골 흡스굴로 함 뜰까 생각 중이다.


11. 필리핀이나 수빅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그냥 인터넷 뒤져라..



추신 : 이번 휴가 때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고서 느낀 바 있어, 그 소설과 유사한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 역사 추리 버디 로드 여행기를 쓸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못쓰겠다. 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예술가들은 돈 많이 벌어야 한다. 책이나 음반은 꼭 돈주고 사라. 그래야 예술가들 사는 거다.



2005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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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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