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양평그란폰도 대회에 3,000명이 참가했다는데 내 등수는 내가 계산한 바로는 2,675등이다. 내가 아침에 400명 정도 앞에 두고 빠르게 출발했는데 달리는 도중 2,354명이 나를 추월했고, 중간에 자전거가 망가지거나 다쳐서 탈락한 사람이 34명이고, 내가 추월한 사람이 45명이기 때문에 간단한 계산으로 내 등수를 산출할 수 있다. 대회 조직위에서는 등수를 발표하지 않지만 이건 내가 자전거 타며 눈으로 보고 머리로 셈을 했기에 틀릴 리가 없다. 


2. 일단 나를 추월한 2,354명의 자전거는 내 것보다 월등했다. 아까 자전거를 타다가 누군가가 나를 추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달랐다. 뒤에서부터 약간 시끄러운 전기차가 달려오는 느낌이 들면 그건 누군가가 나를 추월한다는 뜻이었다. 라쳇 소리도 달랐다. 내 라쳇 소리는 100일 된 갓난아기 수면 보장을 위한 자장가 소리인데 다른 자전거 라쳇소리는 한여름 매미 소리였다. 


3. 그들의 장비 또한 뛰어났다. 공기역학적 헬멧과 저항성을 줄인 자전거복, 자전거 RPM수와 심박수를 측정해 알려주는 기기, 그리고 빠르게 근육을 회복시켜주는 에너지젤과 마그네슘 캡슐 등등. 자전거 타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이클링에서 가장 중요한 게 결국은 엔진에 해당하는 허벅지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자기들은 이렇게 자전거와 장비에 투자하는 것일까? 소위 장비빨은 실제 효과가 있는 것일까?


4. 영국은 자전거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페달을 이용한 첫 자전거를 만든 이는 스코틀랜드의 커크패트릭 맥밀란이었고,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가 작은 옛 전통 자전거 페미 파딩을 만든 이도 영국의 제임스 스탈리였다. 제임스 스탈리는 자전거 산업의 아버지쯤으로 불리는데 자전거 대량생산의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국 자전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존 보이드 던롭이다. 바람을 넣어 충격을 흡수하는 공기 타이어를 고안한 인물이다.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에 더해지자, 승차감이 부드러워지며 19세기 말 영국의 자전거 제조업은 폭발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말 영국 공업도시 버밍엄의 자전거 제조업체는 무려 177개에 달했다. 요즘의 2차전지산업 못지않게 자전거 제조업과 관련한 주식시장도 뜨거웠다. 당시 주식 수익률 1,138%를 기록한 회사도 있었고, 자전거 회사 평균 주가지수는 영국 종합주가지수의 3.5배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대부분 거품이어서 그 뒤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만 말이다. 


5. 이런 자전거 종주국 영국이 놀랍게도 사이클링의 역사에서는 이렇다 할 명함을 내놓지 못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자전거 대회인 뚜르 드 프랑스에서 1903년부터 2011년까지 단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뒤 2012년부터 7년 동안 무려 6번이나 영국 선수가 뚜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사이클에서만 금메달 8개를 따내기도 했다. 도대체 영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6. 영국은 과거와 달리 새로운 전략으로 사이클팀을 운영했다. 뭔가 어마어마하고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려놓고 선수와 자전거 관련한 분야에서 1%씩만 개선하자는 과정 중심의 전략을 채택했다. 선수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도록 영양식 개선, 선수에게 더 편안한 디자인으로 안장 디자인 변경, 허용된 범위에서 최대한 타이어 무게 줄이기, 선수들에게 양질의 잠을 제공한다는 베개 제공, 빠르게 근육통을 완화한다는 마사지 젤 사용, 사이클링 이후 감염을 피하기 위한 손 씻기 등등. 이런 각 분야의 작은 개선이 누적되어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7. 잘 나가는 주식투자기법이 알려지면 모두 따라하듯 이제 영국의 저런 전략은 아마추어나 동호회 수준에서도 일상화되었다. 각 분야에서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것이 쌓이고 쌓이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단 100g의 프레임 무게를 줄이기 위해 기꺼이 몇백만 원을 쓰기도 하며, 공기역학적 구조의 헬멧과 자전거복에 수십만 원을 투자한다. 조금이라도 자전거 타는 사람이라면 파워미터를 쓰고 이를 분석하며 자신의 주법을 개선하는 것도 일상이다. 먹는 건 또 어떤가? 자전거 대회에 맞춰 식이요법을 진행하고, 빠르게 근육을 회복시켜주는 에너지젤과 바를 준비해 먹는 것도 잘 알려진 방법이다. 자기 몸속에서 수백 그램의 노폐물을 빼냄으로써 몸무게를 줄이려는 시도 또한 극적으로 이뤄진다. 오늘 아침 양평종합운동장 화장실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일을 보던가 말이다. 


8. 하지만 나는 장기하의 노래처럼 이런 게 전혀 부럽지가 않다 부럽지가 않아. 내게는 남들처럼 속도나 등수라는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자전거는 그저 여행의 동반자다.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게 자전거 타기다. 빠른 산책 정도. 오늘 컷오프당하지 않으려 속도에 집착하며 타느라 아름답다는 양평 가을 풍광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 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내가 오늘 2,675등을 해서 그리고 더 좋은 장비가 필요하다고 누군가에게 호소하려고 이 글을 쓰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아, 근데 오늘 진짜 에너지젤 없었으면 탈진해서 쓰러졌을 거다. 역시 장비빨인가? ㅎ

 

2023년 10월 9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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