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죽설헌에 다녀왔습니다.
죽설헌은 전남 나주시 금천면에 자리잡은 개인 정원입니다. 수묵화가 시원 박태후 선생이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직접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땅을 파고 기와를 놓아 만든 정원입니다. 처음에 땅 한평 없이 자신의 생가터에 집을 새로 지으며 조성하기 시작한 정원은 이제 7개의 못을 가진 1만 3천평 규모의 거대한 원림이 되었습니다. 50년가량 된 나무들이 마치 밀림처럼 숲을 이뤘고, 30년 넘은 왕버들은 습지에 그림 같은 풍광을 선사합니다. 대나무숲, 파초밭, 질경이길, 왕버들습지가 구분된 듯 구분되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숲이 되어 정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책길은 넓어졌다 좁아지고 밝아졌다 어두워집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궁금해 고개 들어보면 저 위에서 뜻밖의 나무가 꽃을 떨구고 있습니다. 선생 내외가 지내시는 집 또한 수평으로 낮게 주변과 잘 어울립니다. 덩굴식물이 집을 감싸고 있어 마치 나무 속에 집이 있는 듯한 신비롭고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선생의 작업실이나 거실 유리창 밖으로 대나무숲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죽설헌은 인공적인 듯 인공적이지 않으며 자연적인 듯 자연적이지 않습니다. 박태후 선생은 평생 '자연 속으로'라는 딱 하나의 제목을 가진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정원에 일궈내고 있었습니다. 죽설헌에서는 나무와 꽃과 풀과 물과 집과 사람과 동물이 따로 또 하나였습니다.
노랑꽃창포가 가득한 왕버들 습지를 내려보다 문득 미술사가 곰브리치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영국의 대표 풍경식 정원인 스투어헤드 가든을 보고 '가히 작가의 서명이 들어갈 만하다'고 평했습니다. 그가 만약 죽설헌을 봤다면 '가히 작가의 낙관이 들어갈 만하다'고 평했을 것입니다. 박태후 선생의 수묵화만큼이나 때로는 담백하면서도 때로는 화려함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죽설헌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정원 곳곳과 집을 설명해 주시고 또 맛 깊은 차를 내어주신 시원 선생님 부부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정원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시원 선생의 뜻을 존중해 개인적으로 하나의 사진도 찍지 않았습니다. 여기 올리는 사진은 같이 방문했던 김경일 시인님과 오구균 교수님이 시원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고 찍은 것들입니다. 사유지에 개인 정원이라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지 못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부부 내외 2명이 관리하고 유지하는 정원인데 이 이상의 방문객을 받는 건 정원에게나 선생 내외에게나 불가능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정원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에 세례를 받고 굴비정식으로 몸에 세례를 받은 축복 받은 하루였습니다.
죽설헌이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 찾아보시면 여러 다큐멘터리 있습니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2024년 5월 6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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