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MBC 9시 뉴스를 보다가 참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클로네이드사가 두 번째 인간복제 아기를 출산시켰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류 및 해양생물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수족관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를 보도하면서 그 시도의 위험성 및 인간복제의 생명윤리적 문제 등을 제기하고 있음에 반해, 두 번째 소식은 해맑은 어린이들이 거북이나 어류를 직접 손으로 만지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스크린에 잡은 것이었다.


2. 한 뉴스 프로그램에서 생명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다르게 대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마도 현재 우리의 생명윤리 수준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 볼 때, 오늘 행사에서 수 많은 어린이와 관객들의 손때를 탄 그 수족관의 어류와 거북이들은 오늘밤 중으로 과도한 스트레스에 못이겨 죽거나 아니면 생존했다 하더라도 경제적 가치가 큰 종이 아닌 이상 폐기(!)될 것이다. 왜냐면 내일 아침에도 팔팔하고 멋드러진 녀석들이 관람객을 맞이해야 하니까 말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그 어류들은 살아움직이는 곧 생명을 가진 장난감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곳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어떠한 생명윤리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거나 혹은 생명윤리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 수족관에 어린이들을 데려간 부모의 입장에서야 도시 안에서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어류들을 어린이들에게 직접 손으로 만지게 함으로써 동물과의 유대감을 형성해 주려고 했겠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밑바탕에는 아주 지독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환경문제나 생명체 복제 혹은 유전공학 문제들을 대할 때 최후의 보루선으로 인간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질 좋고 맛 좋은 고기나 우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황소나 젖소를 복제하는 것은 조금 꺼림직해도 그럭저럭 허락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감히 존엄성있는 인간을 복제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류의 그런 보루선말이다. 실제 클로네이드사의 첫 번째 인간복제 아기의 출산이 보도된 다음에 각 미디어의 칼럼을 보면 대부분의 논조가 그러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그러한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쉽게 무시하고 있는 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가 언제든 백인중심주의 혹은 더 나아가 앵글로색슨족(WASP) 중심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례로 북유럽에서 환경기업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다국적 석유회사인 쉘(Shell)같은 경우 나이지리아에서는 제2의 군사정부로 기능하며, 석유굴취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을 향해 군사적행동도 주저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쉘에게 원주민이란 인간이 아닐 것이며, 애써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는 북유럽 시민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자연이 파괴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나 인간의 삶과 복지를 위해서라면 결국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인데, 이 때의 인간이란 우리일 수도 있으며 아닐 수도 있다.


4. 계미년 신년 1월 1일에 국제면을 본 사람이라면 미국에서 뉴캐슬병에 걸린 닭 100만 마리를 폐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단신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닭을 폐기(!)한단다. 이미 우리에게 닭은 생명체가 아니며 단지 고기덩어리를 공급하는 움직이는 공산품에 불과한 것이다. 생명체에 "폐기"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수준이 바로 우리의 생명윤리수준인 것이다.


5.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쓴 [화anger]라는 책을 보면, 현대인에게 화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화로 가득찬 음식을 먹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있다. 나는 영성에 관해 이야기한 것으로 읽었는데, 고통, 울분, 좌절로 가득찬 닭고기 쇠고기 우유 계란 등을 우리가 섭취하면서 그러한 고통 등이 화가 되어 인간에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나는 슬플 따름이다.


2003년 1월 6일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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