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소식

낙서장 2023. 2. 1. 17:47

 

자전거 타니 울적한 맘이 좀 가신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같은 반이 되면서 알게 된 이 친구는 1교시부터 8교시 끝날 때까지 수업시간 내내 계속 잠만 잤다. 정말 수업 시간에는 깨어 있던 적이 없었고 줄기차게 졸거나 잤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크게 뭐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반장으로서 수업 시작할 때나 끝날 때는 꼭 깨서 "선생님께 경례!"는 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시험 보면 항상 전교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기도 했다. 

 

이 녀석은 학교 근처에 살면서도 꼭 자전거를 끌고 다녔다. 나랑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아 밤 10시 반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같이 하교하면서 별의별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광주 화정동 대로변을 그 녀석은 느릿하게 자전거를 타고 나는 걸어 가며 UFO며 여자며 정치며 이런 주제로 시시덕거렸다. 여름 밤 커다란 메타세콰이어 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던 주황색 나트륨등은 아직도 생생하다. 

 

경영대 졸업하고 공인회계사 되고 삼성경제연구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이 친구에게 연구실 여자후배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삼성을 나와 몇몇 기업을 거친 뒤 창업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지만 나도 그 녀석도 사회에 적응하고 자리잡기 바빠 그리 자주 만나지도 만나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친구들 경조사 때나 겨우 서너 번 만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업 초기에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사이판 가서 3~4일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면 다 해결된다'고 해결책을 주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회사 해외 워크샵은 이 친구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이 친구와 다시 만난 건 작년 초였다. 돈은 많고 투자할 곳 없는 경영대 친구들 등살 때문에 문득 내가 생각났다며 전화를 했다. 아직도 사업하냐며. 그뒤 우리 회사 찾아오고 또 신제품 기획을 도와주고 그랬다. 난 이 녀석이 또 다른 대학원에 진학해 오픈소스 하드웨어를 활용하는 내용의 석사논문을 썼다는 사실도 이때 알게 됐다. 이 친구 창업 아이템이 오픈소스 하드웨어를 이용한 3D 프린터와 관련된 거였다. 이 녀석은 봄에는 기업 회계감사를 하며 지냈고, 이후에는 주로 자기 사업을 했다. 3D 프린터로 찍어낼 수 있는 설계도면을 블렌더로 직접 그려서 인터넷에 올리고 유투브 채널을 통해 그런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를 하는 고등학교 친구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하는 내가 함께 어떻게 오픈소스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가 토론하곤 했는데 이게 참 낯선 경험이었다. 

 

이런저런 사업 아이디어를 함께 발굴하고 논의하다 교류가 끊어졌는데 나는 그게 우리 회사의 준비 부족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때 마침 제품 핵심 개발자가 퇴사하기도 했고. 근데 이번에 소식을 들으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암 투병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여름부터 입원해 치료 받았던 모양인데 나나 다른 친구에게나 이런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11월 말에 통화했던 친구에게도 자신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동기들과 통화하고 전화 받고 하면서 다들 딱 하나 공감했다. 더 자주 보고 건강하고 행복하자고. 나이든 어르신들이 이런저런 대소사나 경조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걸 보며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그 맘이 이해가 된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못 볼 수도 있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다. 친구랑 한동안 연락이 끊겼을 때 가끔 뭐하며 사나 싶었는데 연락이 되고 보니 나름 재미난 주제로 신나게 잘 살고 있었다. 이제 이 친구는 저 세상에서 역시나 재밌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쉰 넘은 나이, 뭘 더 비교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친구들에게 연락해 한 놈이라도 더 만나고 더 놀아야겠다. 

 

잘 쉬어라.

 

2023년 1월 31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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