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낯선 책이 하나 놓여 있는 게 우연히 눈에 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책을 잡아 내지의 첫 장을 살펴 본다. 아무런 기록 없이 깨끗하다. 나는 책을 사면 책을 손에 쥔 날짜와 구매한 곳 그리고 내 이름을 내지의 첫 장에 기록해 놓는 버릇이 있다.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도 자기가 산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책을 사고도 '흔적' 남기는 걸 깜빡한 겐가?
소설책이다. 대학 졸업 이후 어지간하면 소설책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다. 문학 작품이 주는 삶에 대한 성찰을 싫어하는 바는 아니지만, 가끔은 공명의 진폭이 너무 커 일상의 삶을 휘청이게 하니까. 그래도 영국 소설이라니 서사적이지 않을까 하며 기분전환으로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한다.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번역투의 왠지 모를 껄끄러움 같은 게 밟히며 마치 초등학교 때 처음 괴도 루팡 소설을 읽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도 묘하게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은 있다. 스토리로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소설이다. 어쩌면 딱 한 두 페이지로 요약이 가능한 그런 이야기다. 마지막의 반전이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예측가능한 결말이기도 하다.
책을 다 읽고서 20여년 전의 여러 아픈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올라온다. 주인공 토니처럼 저 머릿속 어디에다가 던져버리고서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순간 혹시 20여년 전이나 그 이후에 나의 행동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몰래 이 책을 내 책장에 가져다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돌아보면 내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아니, 가해자이기도 하면서 피해자이기도 하겠지. 10여년 전에 우연히 술자리에서 전해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아물지 않고 남아 있는 걸 보면.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한 구절처럼 사람은 기억을 통해 존재가 규정된다. 그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라 할지라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센티해지기로 하고. 다음에 기회되면 영문 원본을 사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최세희 옮김. 다산북스. 2012. 12,800원
2013년 3월 17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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