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보에 도달할 즈음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준비 중인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던 분이다. 함께하기 어렵겠다며 완곡하게 내 제안을 거절하셨다. 자전거를 타느라 들떠 있던 기분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백제보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내 제안이 좀 부족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기분은 도통 좋아지지 않고 심연으로 가라앉기만 한다. 그러다 문득 왜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가 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그분의 거절 이유를 내게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책하고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이고 좋은 제안을 했다면 아마도 함께했을 것이라며 과거의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또 다른 내가 내게 속삭였다. 너는 최선을 다했으며 상대방의 결정은 네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행복하게 살면 다른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이 우울한 순간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이 자전거 길에서. 감사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백제보에서 자전거를 돌려 세종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날 때마다 먼저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외치기 시작했다. 다들 반갑게 화답해 주셨다. 처음에는 좀 뻘쭘했는데 몇 번 그렇게 하니 진짜로 기분이 좋아지며 더 신나서 계속 만나는 분들께 인사를 건넸다. 행복하게 살면 다른 기회가 오겠지 하면서 말이다.
신기하게도 공주쯤에 도착하니 아까 그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추가적인 제안을 드렸고, 그분도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를 자책할 이유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행복할 따름이다.
2024년 5월 1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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