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학부모 사인해달라며 슬그머니 한자 시험지를 들이민다. 서른 문제 중 두 문제를 맞았다. 두 문제 틀린 게 아니고 두 문제만 맞았다. 한자 쓰기도 아니고 읽기 시험이었다. 황당해서 애 얼굴을 바라보니 그제야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한자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는 것은 세종대왕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우리 글이 있는 이때 한자를 공부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까지 우리 조상은 대부분의 문자 생활을 한자로 했기 때문에 조상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한자는 배울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애는 그런 한자들은 이제 전문가들이 알아서 번역하고 쉽게 풀어서 알려주는 시대이기 때문에 옛날처럼 일반인이 한자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림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겨서 도대체 이해도 안 되는 한자를 공부하느니 차라리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주장하며 말이다.
애랑 이야기하며 두 가지를 느꼈다. 우선은 이제 애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변명(Excuse)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흐뭇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애가 컸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이런 변명을 통해 기존과 다른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가는 훈련을 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저런 논리적 맹점을 찔러 보기도 했지만 즐거운 맘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사실 전환적 사고의 대부분은 이런 변명의 논리적 체계화였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유전자의 위대함을 느꼈는데, 한자를 극히 싫어하는 점이나 한자를 '그림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겨서 도대체 이해도 안 되는 글자'라고 표현한 점에서 그랬다. 할아버지가 고향 마을의 훈장님이셔서 항상 한자를 내게 가르치셨는데 그럴 때마다 난 내 딸과 거의 문구 하나 틀리지 않는 표현으로 할아버지께 땡깡을 부리며 할아버지의 교육을 요리조리 피해갔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형님이 한문과 붓글씨에 능통했던 점을 미뤄 생각해 본다면 이 한자 혐오증(?)은 내 부계 쪽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1월 25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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