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의 아빠와 아빠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 말이야."
"왜 갑자기?"
"응. 우리 반의 XX 할아버지는 요리사이고 걔 엄마 아빠도 모두 요리사야. 그리고, OO 할아버지는 목사님이고 아빠도 목사님이래. 그래서 우리 집도 뭐 그런 게 있나 싶어서."
"아빠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 지으시면서 마을 훈장님을 하셨고,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한국은행을 다니셨지."
"그럼 우리 집안은 대충 뭔가 이어받아서 하는 게 없네?"
"뭐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책 읽는 걸 좋아하기는 했던 것 같아. 내 할아버지도 훈장님이셔서 집에 한문책이 가득했고, 네 할아버지도 어렸을 적에 한문과 붓글씨 신동으로 유명하셨대."
"아, 그래서 아빠가 책을 좀 읽는 거군. 근데, 내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어?"
"할머니 집에 사진이 있는데 못 봤니? "
"어, 못 봤는데. 할머니 집에 가면 다시 봐아겠네."
"네 할아버지는 점잖고 잘 생기셨지."
"큰 아빠나 고모들이나 아빠 형제들은 다 점잖고 그러던데 왜 아빠만 안 그래?"
"아, 그래서 네 할머니께서 걱정이 많으셨단다. 맨날 까불고 촐삭거린다고."
"이해가 되네. 근데,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한마디로 좋은 분이셨지. 아빠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모두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지."
"어떻게?"
"할아버지는 누가 오든 항상 예를 갖추며 존대를 하셨고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지. 아빠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70년대 중반 기억이야. 한국전쟁 끝나고 20년이 조금 지난 때라 보릿고개도 남아 있고 한국전쟁 때 다친 상이용사도 많을 때였지. 늦봄이 되면 상이용사가 우리가 살던 그 산골까지 왔어. 한쪽 손은 갈고리이고 한쪽 다리는 나무 다리인 분들이 마을을 찾곤 했어. 먹을 걸 찾아서. 그러면 대부분의 집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으로 들어갔지. 근데, 할머니는 그분들이 오시면 따뜻한 밥에다가 나한테도 안 주던 맛있는 반찬까지 내서 큰 상을 차려 주셨지. 그분들이 눈물 흘리면서 밥을 드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분들이 가실 때 할머니는 됫박으로 쌀까지 퍼 주셨어."
"와, 아빠 할머니 진짜 대단하시다. 근데, 왜 나라를 지키려다 다쳤는데 나라가 제대로 대접을 안 해 준 거야?"
"그때는 나라가 너무 가난했으니까.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겠지."
딸애는 한참을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거리다 잠에 들었다. 생일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문득 그립다.
2019년 12월 11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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