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버밍엄에 갔었지요. 그때 들렀던 성 필립스 성당에서 추모비를 하나 봤습니다. 1974년 11월 버밍엄에서 두 건의 폭탄이 터져 숨진 21명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추모비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아 오늘 이에 대해 검색을 좀 해 봤습니다. 여기에도 또 영국의 굴곡진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더군요.


1974년 11월 21일 저녁 버밍엄 중심가 펍 두 곳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합니다. 10분 간격의 이 연쇄 테러로 21명이 죽고 182명이 중상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납니다. 영국 경찰은, IRA의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즉각 이 사건을 IRA의 범행으로 규정하고 버밍엄을 떠나 벨파스트로 가던 아일랜드인 6명을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Birmingham Six라고 불렸던 이 아일랜드인 6명은 처음에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자백을 하고 1975년에 종신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수감된 뒤에 자신들의 무죄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법원에 재심을 요청합니다. 결국 법원은 1991년에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재심에 착수한 뒤, 이들의 자백은 경찰 폭력에 의한 것이며 증거는 경찰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고 이 6명을 모두 석방합니다. 이들은 수감된지 17년만에 무죄로 풀려난 것이지요. 이들은 2001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개인당 최고 120만 파운드 정도를 배상금으로 받아냈습니다만 잃어버린 그들의 청춘 17년은 어떻게 보상 받을 길이 없겠지요.


자, 이제 이 사건은 미제 사건이 되고 맙니다. 범인이라고 기소하고 투옥까지 시켰던 6명이 모두 풀려났으니 진범 없는 사건이 되고 만 것이지요. 영국 역사상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에 진범이 없게 된 것입니다. 버밍엄 폭탄 테러 유족들과 피해자들은 모두 열 받을 수 밖에 없구요. 유족들은 진범을 찾아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며, 이 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를 계속 청원 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국 경찰은 재수사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는 있으나 실제 재수사에는 아직 착수하지 않은 상태라고 하네요.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만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폭탄 테러 피해자도, 무고한 6명의 아일랜드인도, 40년 가까이 진범을 못 찾아낸 영국 사회도, 신뢰가 실추한 영국 경찰도 모두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인의 핵심에는 잘못된 공권력 행사가 자리잡고 있구요. 공권력이 잘못 행사될 경우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한 사회에 긴 상흔을 남길 수 있는지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이 사건을 보며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이 왜 그리 떠오르던지 말이죠. 


2014년 10월 1일

신상희 


참조 : 

http://en.wikipedia.org/wiki/Birmingham_pub_bombings

http://en.wikipedia.org/wiki/Birmingham_Six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176341/Cold-case-cops-probe-Birmingham-pub-bombings-killed-21-revellers-nearly-40-years-ago.html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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