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이제 집에서도 대화의 한 20~30%는 영어로 이야기를 한다. 대충 보니 학교에서도 선생님이나 친구들하고 별 무리 없이 영어로 대화를 잘 하는 것 같다. 영국에 온 지 근 1년 만에(사실 이번 주 일요일이 영국 온 지 딱 1년되는 날이다.) 나름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보통은 "애들이 참 빨리 언어를 배우죠."라는 답이 돌아오고는 한다. 그런데 문득 애들이 이렇게 빨리 영어를 배우는 이유를 그저 애들의 생득적 언어 습득 능력만으로 치부하는 게 올바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 싶어 몇 가지를 짚어본다.


1. 일단, 딸아이는 학교에서 오전 8시 55분부터 오후 3시 15분까지 6시간 20분 동안 영어에 노출되어 있다. 딸아이는 그 시간 동안 생존(!)을 위해 영어만을 들으며 영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하루에 6시간 이상의 영어 노출은 사실 굉장한 양이고, 성인이라도 1년 동안 이 정도 시간을 영어에 노출되었다면 당연히 영어를 잘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 딸아이랑 같은 학년에 있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한 한국인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2. 딸아이나 딸아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이 쓰는 영어가 굉장히 쉽고 단순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거의 100 단어도 안되는 단어를 사용해서 원하는 바를 서로들 다 이야기한다. 성인들처럼 어렵고 힘겨운 단어 안 쓴다. put 하나로 신발, 옷, 헬멧을 신고, 입고, 쓰는 걸 다 표현하는 식이다. off라는 단어 하나를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하게 쓸 수 있는지 말이다. 나도 가끔 딸아이 친구들이랑 학교에서 대화하며 영어 연습을 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걔들이랑 이야기하면서 배운 표현들이 진짜 쉽고 일상생활에서 바로 먹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성인들은 항상 쉽지 않은 말들을 배운다. 자전거에서 내리라고 할 때 dismount라는 표현을 쓰는 일반적인 영국인들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 딸아이와 그 친구들을 관찰해 보면 애들은 영어로 말하는데 있어 아무 생각이 없다. 무슨 말이냐면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어법에 맞는지 어떤지 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너무 당연하게도)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뱉어낸다. 아마 애들이 쏟아내는 말을 그대로 적어 보면 어법도 안 맞고 주어 동사도 뒤엉켜있고 막 그럴 거다. 그래도 말이 통한다. 왜냐면 내가 봤을 때 애들에게 말은 그냥 소통의 수단(communication vehicle)일 뿐인 거다. 뒤죽박죽이든 말든 의미가 전달되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사실, 우리 한국인 성인들도 마찬가지인데, 한국 성인들이 서로 대화하는 걸 녹취해 보면 어법과 어순에도 안 맞는 이야기 투성이라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도 영어 말 할때만 되면 갑자기 어법과 어순에 집착하니 그저 놀라울 뿐인 거다.


사실 애들의 놀라운 언어 습득 능력이 영어를 익히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애들의 생득적 언어 습득 능력 못지 않게 위에서 언급한 저런 환경이나 자세가 애들의 언어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아마 부인할 수는 없을 거다. 길게 돌려서 이야기했는데, 결론적으로 성인들도 철판 깔고 한 1년 간 구르면 다들 영어를 내 딸이 하는 이상은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ㅎ


2014년 10월 23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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