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롭기는 하다. 


오늘 몸이 좋지 않아 하루를 쉬었다. 지난 몇 주간 무리했나 싶다. 저녁 먹고 책 읽다 무슨 생각이 들어선지 손을 뒤집어 책 표지를 다시 봤다. 윌리엄 블레이크 시집이다. 그의 '순수의 전조'를 읽는데, 오랜만에 책 냄새가 난다. 종이가 다른가 보다. 내가 골라서 시집을 읽는데 책도 내 주변도 낯설다. 내가 신비주의 시인인 블레이크를 읽다니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골똘히 생각할 일은 없다. 올해 읽은 책의 40%가량은 영적, 종교적 주제였거나, 아니면 지극히 유심론적이고, 신비주의적 내용을 담은 책이다. 어제와 오늘 오후까지도 '끌어당김의 법칙', '생각이 현실이 된다'로 유명한 시크릿을 읽었고, 그전에는 네빌 고다드를 읽었고, 또 그전에는 닐 도널드 월쉬를 읽었다. 사주팔자니 주역이니 하는 책도 들춰봤다. 


예전 같으면 뭔 헛소리인가 하고 몇 줄 읽다 집어던졌을 텐데 요즘은 그래도 계속 읽고 신기하게도 더 사서 읽는다. 말도 안 되는 의사과학류의 주장에는 폭소를 터트리지만 책을 놓지는 않는다.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되는 신기함을 경험한다. 마음에 묘한 힘이 되고 또 위안을 받는다. 이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갖나 보다. 


대학 입학 이후로 지금껏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한 유물론자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책도 딱딱 떨어지는 책을 좋아했고, 의사결정도 나름 숫자나 증거, 아니면 최소한 추론에 기반해서 하려고 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그에 따른 보상으로 성공, 행복, 부귀가 당연히 따를 것이라는 확률적 희망과 함께 말이다. 


쉰을 넘어서며 이렇게 잘게 쪼개고 분석하는 방법론이 삶의 본질적인 질문에는 답을 주지 못하더라는 의구심이 짙어져만 갔다. 누구나 행복, 성공, 명예, 건강을 바라고 또 이를 위해 노력하지만, 삶은 갑작스런 사고나 죽음, 인간관계의 파탄, 질병, 실패를 답으로 대신 내놓기 일쑤였다. 이 길만은 아니라고 피하려 했던 길이 희망의 길이었고, 반대로 꽃길이 가시밭길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Known unknowns인 줄 알았더니 Unknown unknowns이더라.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낼 때 하늘을 보고 외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닌데 왜 이리 시련을 주시느냐고. 답이 왔고, 희미하던 답이 더 또렷해졌다. "이미 다 정해진 길이다." 그래서 블레이크를 읽는다. 모래 한 알에서 세상을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보려고.

 

2024년 10월 14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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