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학부를 졸업할 즈음 가을 대학 캠퍼스에는 IT 기업의 구인 광고가 곳곳에 나부끼곤 했다. '삼성SDS 1,000명 모집', 'LG-EDS 800명 모집', '쌍용정보통신 600명 모집', '현대정보기술 400명 모집' 등등. 11월이 되면 이런 회사에 다니는 선배들이 학교를 찾아 캠퍼스 간담회네 호프집 면접입네하며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은 졸업예정자와 만나려 애썼다. 


2. 지금 와서야 고백하자면 동아리 선배한테 부탁받고 과 후배와 동기를 이런 자리에 몇 명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이 결정되었으며 더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그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3. 이렇게 입사한 이들은 대부분 6개월가량의 신입 개발자 교육을 받았다. 친구에게 얻은 개발자 교재는 체계적이어서 참 부럽기도 했다. 반대로 당시 LG-EDS 사장의 '우리 교육을 받은 모든 개발자는 같은 상황이라면 동일한 코드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것이다'는 발언을 접하고는 역시 개발자의 창의력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 이런 곳은 갈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대학원생으로 혼자 인터넷 보며 이런저런 소스 코드 흉내 내며 겨우겨우 프로젝트 수행하던 처지에 자존심만 더럽게 셌던 것 같다. 


4. 여하간 이때 대기업들은 전공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IT 인력 뽑아서 6개월가량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해 현장에 내보냈다. 견디지 못하면 자르면 그만이었다. 당시 교육은 '코딩 교육인지 스트레스 관리 교육인지 모를 정도'로 강도 높았다. 


5. 대기업에서 문화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창업하거나 아니면 중소기업으로 전직을 하곤 했다. 그들은 네이버, 한게임, 버디버디, 프리챌 등을 창업하거나 유망한 중소기업에 이직하며 개발자 풀을 풍성하게 했다. 최소한 당시에는 개발자 낙수효과가 상당했다.  


6. 세월이 흘러 2022년 현재 이제 대기업의 IT 계열사나 잘 나가는 스타트업은 더 이상 신입사원을 뽑지 않는다. 위 그림처럼 이미 경험을 쌓은 개발자만을 골라 뽑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신입 개발자를 교육하고 키우는 책임을 지고 있는 걸까? 바로 중소기업과 사회가 그 부담을 지고 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은 사회화하는 구조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7.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하는 게 계층 상승의 모범적 사다리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대기업의 비용 절감과 교육훈련 하방 전가의 전형적 행태이기도 하다. 왜 대기업의 교육과 훈련을 중소기업이 책임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대가로 중소기업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대기업은 막대한 교육훈련비를 절감함으로써 더 많은 급여를 제공할 여유를 가지고 이를 활용해 더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게 되지만, 반대로 중소기업에는 그 교육훈련비가 고스란히 비용으로 전가되며 우수 인력을 붙들어맬 재투자 여력마저 사라져간다. 

 

8. 시대가 바뀌었다. 과감하게 중소기업의 인재 양성 역할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보상책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중소기업이 단지 경제적 활동 주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재 양성 기관으로서도 역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뭔 헛소리냐고?


9. 2005년 박지성이 PSV 아인트호번에서 맨유로 이적했을 때 박지성의 출신학교인 세류초, 안홍중, 수원공고, 명지대 등이 소위 돈벼락을 맞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FIFA는 프로 선수의 이적료에 '연대 기부금(solidarity contribution)'을 적용하고 있다. 쉽게 말해 선수의 성장을 도운 기여자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이다. 박지성이 다닌 학교들은 이 연대 기부금의 혜택를 받은 것이다. 


10. FIFA도 하는데 우리나라 정부가 '중소기업을 위한 사회적 연대 기부금' 정책을 펴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어느 나라도 하지 않기에 우리가 먼지 시행하면 모범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First Mover의 역할이다. 중소기업의 경제적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0년 현재 전체 근로자의 82%가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사회의 근간이자 안정의 핵심이라는 의미다. 


11. 우리가 먼저 전 세계에서 최초로 중소기업의 인재 양성 역할을 인정하는 과감한 정책을 내놓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이력관리도 다 하는 나라에서 도대체 뭐가 불가능하겠는가? 이건 단지 의지와 대범한 상상력의 문제일 뿐이다.

 

2022년 9월 12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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