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rce: https://pix4free.org/photo/18846/proof-of-concept.html>
1. 오늘은 대기업이 손 안 대고 코 푸는 PoC(Proof of Concept)의 마법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2. 2005년인가 2006년인가로 기억한다. 모 통신회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도통 계약을 안 해주는 거다. 당시 우리 회사 위치는 '갑을병정'에서 '정'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도 엔진을 공급하고 이와 관련한 커스터마이징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역할과 책임이었다.
3. 주로 관공서와 일을 하다 민간 대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선뜻 승낙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도무지 계약을 안 해 줬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계약의 기미가 없어 30대 혈기왕성한 성격에 전체 회의 석상에서 프로젝트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그때 들었던 말이 충격적이었는데, "원래 통신사 프로젝트는 진도율이 80%가 넘어야 본 계약을 하는 게 관례다. 통신사 사업 처음 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4. 21세기 대명천지에 아직도 이렇게 일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는 것이, 그것도 재계 서열 10위권 내 통신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TV 광고에서 보여주는 통신사의 세련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실체를 본 느낌이랄까? 일을 계속할 사이트는 아니라는 생각에 빨리 마무리 짓고 돈 받고 철수하면서도 뒷맛이 참 개운치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만 이런 생각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얼마 뒤 공정위가 이런 통신사의 관행을 적발하고 철퇴를 가했다.
5. '80% 진도율 계약'은 이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R&D 분야에서는 PoC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더 광범위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PoC(Proof of Concept)은 말 그대로 기존에 없던 기술을 도입하기 전에 이를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PoC 이후에는 PoV(Proof of Value)를 통해 신기술이나 새 공정의 경제성과 가치를 평가하게 된다. 싱가폴 정부는 PoC 레벨과 PoV 레벨을 구별하여 R&D 자금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6. 대기업의 PoC는 다음과 같이 이뤄진다. 급하게 돌아가는 현업은 아니지만 뭔가 기술적 트렌드이거나 임원이 관심 있는 주제일 경우 PoC를 시작한다. PoC 주제와 관련된 회사를 찾아본 뒤 몇몇 회사를 추려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 "귀사의 솔루션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이번에 ***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스템 구축을 하려는 바 관련된 PoC 참여를 요청드립니다." 물론 대가는 없다.
7. 기술 중소기업들은 이런 PoC 참여 요청 이메일을 받으면 자신들의 기술력이 드디어 인정받았다며 기쁘고도 들뜬 마음으로 기꺼이 승낙하지만 PoC에 대한 기대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덩치 차이만큼이나 하늘과 땅처럼 멀기만 하다.
8. 대기업이 요구하는 PoC는 PoC가 아니다. PoC의 구축 범위가 전국인 것은 일상이며, 사실상 본 사업의 80% 가까운 시스템 개발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런 수준의 요구를 한 개 중소기업이 아니라 몇 개 기업에 동시에 요구하며 법률적으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9. PoC를 수행하다 보면 대기업의 실무자에게 별의별 감언이설을 듣게 된다. "조금만 더 해서 상무님이 원하는 수준만 되면 본 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기업은 이 정도 기능과 수준을 보여줬는데 제 생각으로는 우리 회사가 그 기능만 구현해 주면 PoC 끝나고 본 계약이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등등
10.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 구라고 절대 믿지 말아야 할 거짓말이다. 재벌과 대기업들은 그들의 돈과 시간을 들여 해결해야 할 문제를 중소기업에게 PoC라는 이름으로 전가하며 가만히 앉아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손에 쥐려 할 뿐이다.
11. PoC가 1차로 끝나는 경우도 많지 않다. 뭔가 기술적 돌파구를 보여 주면 다시 몇몇 기업을 불러들여 2차 PoC로 이어진다. 본 계약 가능성과 임원의 관심을 계속 언급하며 말이다. 1차 PoC의 성공을 위해 2~3달씩 원룸 빌려가며 임직원을 파견해 투자한 중소기업들은 이때 멘탈이 붕괴하기도 한다.
12. PoC 결과가 맘에 안 들면 단순하다. 반도체 시황이 안 좋아졌다든가 디스플레이 시장이 안 좋다든가 아니면 관심 있던 임원이 갑자기 다른 부서로 발령나거나 짤려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중소기업은 그 말이 진짜인지 어쩐지 알 수도 없다. 어차피 그들은 공짜 PoC를 통해 이 기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기술적 노하우를 습득한 상태라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없다.
13. PoC 결과가 좋으면 대박이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래도 중소기업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보통 주력 대기업 밑에 관련 대기업 IT 계열사가 있고 그 밑에 1차 벤더가 있고 다시 이 1차 벤더를 통해 중소기업은 솔루션을 공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론적으로 2005년의 통신사 계약 구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기술이 좋아도 대부분 '정'의 위치쯤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갑을병정'의 계약사슬을 통과하며 기술은 상납되고 이익은 착취된다. 중간에 지대를 취하는 이들만 가득하기에 그렇다. PoC든 본 사업이든 성공해도 핵심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의 이름을 찾기는 어렵다. NDA를 통해 홍보 자체를 금지시키는 경우가 많다. 언론에 성공사례가 나가도 중소기업 이름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14. 중소기업이 한겨울에 반팔 반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집에 긴팔 긴바지가 있는데 계절과 환경의 변화에 둔감해서가 아니라 오리털 파카 사 입을 돈을 대기업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먼 곳에서 찾지 말자. 도대체 정부와 공정위는 다시 도진 이 악행을 언제까지 모른 척하며 그대로 둘 건지 궁금하기만 하다. 오늘도 대기업 회장님은 ESG 경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시고 언론은 이를 칭송한다.
2022년 10월 10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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