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규분포

낙서장 2023. 4. 10. 11:53

 

고등학교 때 배운 정규분포는 세상에 관해 생각보다 많은 함의를 내포한다. 다른 방향의 두 사건이 같은 확률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해외 토픽에 가끔 억수로 운 좋은 사람이 보도되지만 같은 확률로 억수로 운 나쁜 사람이 보도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마치 누군가 돈을 땄으면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돈을 잃어야만 하는 주식시장처럼 말이다. 어쩌면 행운과 불행은 함께 다니는 일란성 쌍둥이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끌어올린 게 사무엘 잭슨과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언브레이커블'이다. 영화에서 사무엘 잭슨은 뭔가에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 부전증 환자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허약한 유리몸이라면 그와는 정반대로 금강불괴 같은 강철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런 사람을 찾는다. 브루스 윌리스가 바로 그런 금강불괴였는데 그는 대형 열차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성장 과정에서도 다친 기억이 없는 인물이었다. -6 sigma가 있다면 +6 sigma도 가능한 셈이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빌 게이츠는 시애틀 외곽에 있는 레이크사이드 중등학교를 다니며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다. 그때가 1968년이다. 빌 게이츠는 같은 학교를 다녔던 폴 앨런과 함께 컴퓨터에 빠져들었고, 둘은 방과 후, 늦은 밤, 주말까지 함께 프로그래밍을 하며 금세 컴퓨터 전문가가 됐다. 그 후 둘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1968년에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컴퓨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던 확률은 얼마나 될까? UN에 따르면 당시 중등학교 연령의 전 세계 인구는 3억 300만 명 정도였다. 마음껏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던 레이크사이드 중등학교 학생수는 300명에 불과했다. 빌 게이츠는 100만 명 중 1명에 해당하는 행운을 가졌던 셈이고, 스스로도 자신의 중등학교 경험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100만분의 1 확률이 반대로 작용하면 어떻게 될까? 레이크사이드 중등학교에는 빌 게이츠, 폴 앨런과 어울리며 함께 사업적 야망을 꿈꿨던 또 다른 학생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켄트 에반스라는 학생이다. 그는 학급 최고의 학생이었으며, 프로그래밍 실력 또한 빌과 폴 못지 않게 뛰어났다. 학교 시간표 배정 프로그램을 빌과 함께 짜기도 했던 학생이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 건 그가 학교를 졸업하기 전 산악 등반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당시 중등학생이 산에서 목숨을 잃을 확률이 100만분의 1이었다. 

 

 

하나를 얻는다는 건 하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것은 어쩌면 드넓다 못해 무한에 가까운 이 우주에서 더 나은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긍정적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까닭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카오스적이기에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100% 장담할 수 없다. 계량화할 수 없는 행운과 불행이 결과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성공이 노력 덕분이 아니고, 모든 실패가 잘못된 결정과 행동 탓이 아닌 게다. 인생에서 행운과 불행의 역할을 인정할 때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더 관대해진다.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의 말, "노력한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될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니더라."가 숙명론이 아닌 이유다.

 

2023년 4월 9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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