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교수님이 전화를 주셨다. 한국 측지기준계를 ITRF2020으로 바꿀 때 기존 데이터와 소프트웨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교수님께 건성으로 이런저런 답을 드리다가 물었다. "근데 왜 또 바꿔요?" 교수님이 답하셨다. "땅이 움직이니까요." 맞다. 땅이 움직인다. 한반도는 매년 2~3cm 가량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고, 호주 대륙은 매년 7~8cm 가량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호주 같은 경우 20년이면 1.5m 정도 이동하는 거라 벌써 기존 지도와 맞지 않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땅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하늘도 움직인다. 지금이야 북극성(Polaris) 바로 옆이 정북 방향이지만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정북 방향도 계속 변한다. 대략 26,000년 주기로 느리지만 조금씩 회전하고 있다. 14,000년쯤 뒤에는 베가성(Vega)을 보며 저쪽이 북쪽이라 할 게다. 23.5도로 알고 있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도 계속 변화한다. 약 41,000년 주기로 22.1도와 24.5도 사이에서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궤도의 이심율은 10만년 주기로 바뀐다. 세르비아의 천문학자 밀란코비치가 이 세 요인를 통해 지구의 주기적 기후변화를 설명해냈다.
불교의 제행무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을 정적인 스냅샷으로 인식하고 그에 바탕해 이해하려 하는 건 그저 인간일 뿐이다. 세상을 정지된 그림처럼 인식하려는 인간의 천성과 달리 가장 변화가 심한 게 인간의 마음이다. 미래를 위해 뛰어난 결정을 내렸다고 자부하지만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기특하게 여길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불 같았던 사랑이 이제는 원수가 되어 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재테크의 구원투수인 줄 알았던 주식이 폭락해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영끌해 샀던 내 집에 정나미가 떨어지며 왜 그때 그런 결정을 내렸나 수없이 후회하기도 한다. 집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소프트웨어 기업을 이끌고 있다 보니 개발방법론으로서 '애자일'을 접하곤 한다. 애자일 방법론의 장점이 뭔가에 관해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내게 애자일 주는 가장 큰 매력은 '개발 과정의 변화'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개발 초기에 모든 요구 사항을 파악할 수 없고, 요구 사항은 개발 과정에서 계속 바뀌며, 언제나 돈과 자원은 부족하더라는 3대 전제가 애자일에 있다. 개발 과정의 정보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프로젝트 하다 보면 직원들에게 매번 듣는 말이 있다. '고객의 말이 계속 바뀌어요!' 그렇다! 고객은 항상 바뀐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인류는 종이지도를 펼친 채 왜 대륙이 계속 움직이냐고 투덜대는 대신 새로운 동적 측지기준계를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 전문가들도 고객의 변화에 황당해 하는 대신 그런 속성이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애자일 같은 방법론을 모색했다. 그게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더 완충감을 준다. 절대적 원칙주의보다는 적절한 합리주의가 더 나은 이유다. 모두가 변하지만 혼자만 그 변화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를 꼰대라 부른다. 젊으면 젊꼰 늙었으면 늙꼰일뿐 큰 차이는 없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아인슈타인 이전에 이미 운동에 관한 상대성 원리를 제시했다.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며,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찰자에게는 동일한 물리 법칙이 적용된다고. 함께 움직이고 변화할지 말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2023년 4월 11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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