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꾸 나고 한참 난감해하다 갑자기 크게 웃었다. 조선 후기 화가 임희지가 떠올라서 그랬다. 

 

임희지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비바람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어질 상황에 부닥쳤다. 뱃사람들도 다들 살려달라고 하늘에 비는 판국에 임희지만 그 자리에서 껄껄대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나중에 살아남아 그 연유를 물으니, "누구든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바다 한가운데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장관은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임희지 생각이 나니 그깟 빵꾸가 뭔 대수인가 싶었다. 택시를 불러도 되고 걸어도 되고 정 안 되면 대전 사는 직원에게 전화해 봐도 되고 뭐 언젠가는 집에 가겠지 싶으니 걱정도 안 되고 애닳지도 않더라.

 

돌아가는 길이 10km라 걸을 만하다 싶어 걸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 밤 자전거길을 걸으니 자전거의 속도로 볼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 보인다. 자전거 도로에 여치가 참 많았다. 그 여치를 사냥하는 탓인지 개구리도 길 곳곳에서 보인다. 여치는 내가 지나가도 도망갈 생각도 안 하고 개구리만 다가가면 한 발짝 풀숲으로 뛰어든다. 길가 곳곳에는 강아지풀이 활짝 폈고, 배롱나무 붉은꽃도 보인다. 이름 모를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오고 풀벌레 소리는 가을을 재촉하더라.

 

음악 들으며 주변 구경하며 걸으니 여름밤 10km도 그닥 먼 거리는 아니었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 세상의 다른 곳을 구경한 듯한 여름밤이었다.

 

2024년 8월 25일
신상희

Posted by 뚜와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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