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좋다.
빠르게 달리면서 여기저기 다닐 수 있어 마치 내 몸이 확장되는 기분이다. 행동반경도 넓어진다. 차와 달리 주차 걱정도 없다. 달리다가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다시 달리고 싶으면 달리면 그만이다.
요즘 열심히 타니 예전부터 자전거 탄 줄로 아시는 분들도 계시더라. 자전거 제대로(?) 타기 시작한 건 작년 5월에 재난지원금으로 34만원짜리 하이브리드 자전거 사면서부터다. 자이언트 에스케이프3라는 모델인데 단단하고 튼튼하고 잔고장이 없다.
자전거 탄다고 특별히 뭘 더 준비한 건 없다. 후미등은 자전거 살 때 보너스로 달아줬고, 전조등은 아내 회사에서 지급된 걸 달아서 쓴다. 열라 밝다. 헬멧은 영국 살 때부터 쓰던 거다. 옷은 그냥 청바지에 셔츠나 여기에 방풍 점퍼 하나 더 걸치는 정도다. 클릿슈즈 따위는 생각도 없고 그냥 경등산화 신고 탄다. 물통은 집에 있는 여러 텀블러 중 하나다.
이제 좋은 자전거 탈 때도 됐다는 이야기도 듣고, 제대로된 장비를 갖출 때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 아직까지는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게 자전거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다. 바뀌는 풍경을 호기심 넘치게 즐기며 이런저런 생각을 뇌가 경련날 때까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바로 자전거 타기다. 그러다보니 자전거를 타면서도 남들처럼 목표라는 게 없다. 이번에는 몇 km를 달려야겠다든가 평속을 얼마로 올려야겠다든가 하는 맘이 없다. 그냥 오늘은 이 길 가면 재밌지 않을까 정도. 그런 면에서 내게 자전거 타기는 속도감 있는 산책 정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돌아보면 지난 내 인생도 그랬던 것 같다. 딱히 뭔가 목표를 두고 열심히 살기보다는 이것저것 찔러보며 그때그때 재미난 일에 더 열중이었다.
2005년에 몽골 흡스굴 호수로 혼자 배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흡스굴 호수 갈 때 차가 자꾸 고장이 났다. 흡스굴 호수를 빨리 가서 빨리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이러다 못 가는 것 아닌가 조바심도 났다. 근데 세 번인가 차가 고장나니까 맘이 오히려 편해졌다. 왜 내가 이리도 흡스굴 호수에 조바심을 내는가 어차피 이건 내 여행이고 이 여행의 목적은 쉼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그 뒤로는 차 고장나면 그냥 풀밭에 누워 음악 듣고 뒹굴뒹굴하거나 아니면 주변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그랬다. 차 고장나도 조바심도 안나고 뭐 언젠가는 흡스굴 호수에 가겠지 아니면 뭐 말고 하면서. 결국 그래도 나는 흡스굴 호수를 다녀왔다. 차가 고장나기 전에는 몽골 초원이 모두 똑같아 보였는데 차가 고장났을 때 내려서 주변을 살피고서야 그 초원에 아름다운 들꽃이 그렇게 흐드러지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릴 때 달려야겠지만 '지금 여기'가 주는 가치를 잃고 싶지는 않다.
2021년 3월 29일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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